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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39. <부정공>처사휘동하묘표(處士諱東夏墓表)
1. 문헌 목록 〉23. 23世 〉41. <부정공>소잠공휘동찬묘갈명(小潛公諱東璨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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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부정공>오산공휘광두묘갈명(梧山公諱光枓墓碣銘)
梧山公諱光枓墓碣銘 梧山趙公平生以宗事爲己任不避風雨不憚勞苦 事皆就緖而煥然可觀 于以公先睦族之誠 綜理事業之才而亦可以見循公忘私之心矣 於乎公固賢乎哉 按公諱光枓 字士遊號梧山趙氏以高麗玉川府院君諱元吉爲受貫之祖 諡忠獻享武曲祠 諱瑜號虔谷 享謙川祠 諱智崙號相好亭 諱大成號梅窓 享武曲祠 曰斗采 曰昌其 曰龍九 曰甲植 曰親諱 妣咸陽呉氏父曰錫黙 公生高宗己丑八月三十日 公性淳質直 外柔内剛 自始學能知勤業 父老有期望 但家貧親老 不得專工 三餘爲課 漁樵供養甘 旨無闕 雖菜果微物 不先父母而嘗 内外喪葬 哀禮備至 先世祭祀城物雙致 勵志治生 產業稍舒儉於自奉 豊於接賓 常以學不專工爲恨 延師敎子 不使暇逸 族中有入山避世逢亂而無力可還出者 公招致同閈 分土耕而典接焉 常帶大小宗中有司之任上自謙川武谷兩祠 芝南白雲履露諸齋之創修 以至諸先代之石物 與大同譜之役 竭誠 致力 莫不完竣吿功 一日寝疾 招其子曰 余雖多爲先事 猶未及乎我祖與考之墓石爲恨 自囊中出金 付之使卒心中事 因考終于 所居私室 기유(一九六九)五月三日 壽八十日 葬于長城洞案山乾坐原 從先兆也 配晋州鄭氏淵黙女 克配君子今在堂 擧五男二女男一勳太勳明勳天勳吾勳 女慶州金鍾植南陽房極周餘不盡錄 公之肖子一勳 將竪墳墓之石 抱家狀而來 請余銘之 辭不得敍之如右 又爲之銘曰 漁樵具甘旨 可見孝之至 平生從事 老爲先誠 亦致延師敎子 篤裕後謀更胎人 有一於此猶可傳諸後 況此兼之者 千秋應不朽 族弟 光萬 撰 오산공휘광두묘갈명(梧山公諱光枓墓碣銘) 오산(梧山) 조공(趙公)께서는 평생동안 종사(宗事)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려 풍우(風雨)를 피하지 않고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으셨다. 그래서 모든 일이 두서(頭緖)가 있어 찬란하게 볼만했으며 종족(宗族)의 돈목(敦睦)을 먼저하는 성의(誠意)와 일을 성취시키는 재주, 또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따르는 마음을 볼 수 있겠다. 그러니 공은 어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諱)는 광두(光枓)요, 자(字)는 사유(士遊), 호(號)는 오산(梧山)이시다. 조씨(趙氏)는 고려 때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진 휘 원길(元吉)을 중흥(中興)의 시조(始祖)로 하는데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으로 무곡사(武曲祠)에서 제사를 받고 계신다. 휘 유(瑜)는 호가 건곡(虔谷)으로 겸천사(謙川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휘 지륜(智崙)은 호가 상호정(相好亭)이며, 휘 대성(大成)은 호가 매창(梅窓)으로 무곡사(武曲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두채(斗采) 창기(昌基) 용구(龍九) 갑식(甲植)은 직계조(直系祖)의 휘이며 어머니 함양오씨(咸陽呉氏)는 석묵(錫黙)의 따님이시다. 공은 고종(高宗) 기축년(一八八九) 八월 三十일에 태어나셨다. 성품이 순후(淳厚) 질박(質朴)하고 외유내강(外柔内剛)하셨다. 처음 학문을 배우면서부터 부지런히 하실 줄을 알아서 어른들이 크게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님이 연로하시어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여 틈틈히 공부를 하고 남은 시간에는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여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봉양(奉養)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으셨다. 또 비록 채소나 과일 등 하찮은 것이라도 부모님께서 먼저 맛보지 않으면 드시는 일이 없으셨다. 또 비록 채소나 과일 등 하찮은 것이라도 부모님께서 먼저 맛보지 않으면 드시는 일이 없으셨다. 부모님의 상(喪)을 당해서는 슬픔과 예(禮)를 다하셨으며, 선대의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고 제수(祭需)를 두루 갖추셨다. 뜻을 분발하여 살림을 이르켜 집안 형편이 조금 펴지게 되었는데도 자신은 검소하고 빈객(賓客) 접대는 후하게 하셨다. 항상 학문에 전념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선생(先生)을 맞아다가 아들을 가르치면서 조금도 한가로이 지내지 못하게 하셨다. 일가 가운데 난리를 피하여 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올 힘이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은 그 사람을 불러다가 한 동네에 살면서 농토를 나누어 주어 경작하게 하여 살아가게 하였다. 항상 대소(大小) 종중(宗中)의 유사(有司) 직책을 맡아 위로는 겸천사(謙川祠) 무곡사(武曲祠) 지남재(芝南齋) 갖추고 대동보(大同譜)를 편찬하는 일에 성의를 다하여 준공(竣工)하고 완성하였다. 하루는 병환이 중해지자 그 아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선대의 일을 많이 하였으나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시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면서 마음에 두었던 말씀을 다하고는 거처하시던 사실(私室)에서 돌아가시니 이때가 기유년(一九六九) 五월 三일이며 수는 八十一세이셨다. 곡성군 장성동(長城洞) 안산(案山) 건좌(乾坐)에 장례(葬禮)하니,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배위(配位) 진주정씨(晋州鄭氏)는 연묵(淵黙)의 따님으로 공(公)을 잘 받들었는데, 지금 살아계신다. 五남 二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일훈(一勳) 태훈(太勳) 명훈(明勳) 오훈(吾勳)이며 딸은 경주(慶州) 김종식(金鍾植) 남양(南陽) 방극주(房極周)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큰아들 일훈(一勳)이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달라고 하여 사양하다가 되지 않아서 위와 같이 적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고기잡고 나무하여 음식 봉양하셨으니 樵具甘旨 효성이 지극하심 것 알겠네 可見孝之至 평생 종사 위하다가 늙으셨고 平生宗事老爲先誠 스승 맞아다가 아들 가르쳤네 亦致延師敎子 후손과 남들 위해 훌륭한 계책 남기시고 裕後謀更貽人 이중 하나만 있어도 후세에 전할 만한데 有一於此猶可傳諸後 더구나 겸비한 분이시랴 況此兼之者 천추 만세에 응당 썩지 않으리라 千秋應不朽 족제(族弟) 광만(光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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